본문 바로가기
글쓰기

을의 을이 타는 버스(을의 시간에 만난 작은 불합리),자동차라는 신분

by JS 임바오 2025. 12. 20.
728x90
반응형

 

“새벽 5시 15분, 을의 시간이 시작된다”

 

새벽 5시 15분, 겨울비가 내린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도시가 아무 일 없이 굴러가기 위해,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오늘도 그들 틈에 섞여 5땡번 버스를 탄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하루의 시작’이라 부르겠지만,
나에게는 늘 ‘을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사람보다 가로등이 더 또렷한 시간, 
도시가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이다.

이른 새벽의 공기는 늘 묘하다.
차갑고, 축축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깨어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 5땡번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청소 일을 하는 분들, 경비원, 시설 관리 노동자들.
도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시간의 승객들을 속으로 이렇게 부른다.
‘을의 을’.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을의 을의 시간’**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자리

나 역시 일시적이지만 비정규직이다.
마지막 목표가 있어서 임시로 하는 일이지만,
몸을 덜 쓰고, 출근만 하면 비교적 조용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

그래서 늘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도 지금은 나쁘지 않다”고.
불평보다는 감사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려고 애쓴다.

흐릿한 창문, 흐릿해진 경계

비가 내려 버스 창문은 습기로 가득하다.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밖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른 새벽의 풍경은 늘 그렇다.
현실과 생각의 경계가 쉽게 흐려진다.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정류장, 그리고 닫힌 문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분명히 벨이 눌렸다고 생각했다.
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벨 안 눌렀잖아요.”

기사는 그렇게 말했다.
버스는 이미 정류장에 서 있었다.
나는 정차 중이니 내려달라고, 조금 크게 말했지만
버스는 그대로 출발해버렸다.

규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미 지나간 뒤에 억지를 부린 것도 아니다.
막 서 있던 순간이었다.
문만 열어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벨이라는 작은 장치가 정말 그렇게 절대적인 조건일까.
특히 비가 내리는 이른 새벽에,
이 시간에 타는 사람들끼리는
조금 더 느슨해도 되는 것 아닐까.

을의 위치에서 시작되는 생각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타는 사람들은
어차피 ‘을의 을’이니까 대충 대해도 된다고 여긴 걸까.
아니면 그냥 일이 피곤했을까.
출근 전에 집에서 부부싸움이라도 한 걸까.

물론 근거 없는 상상이다.
하지만 을의 위치에 오래 머문 사람은
작은 불합리 앞에서도 이유를 자기 안에서 먼저 찾는다.

2정거장을 지난 역앞, 그리고 5천 원

결국 나는 두 정거장을 더 가
전철역에서 내렸고,
택시를 탔다.

현금 5천 원.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그 돈이 ‘생돈’처럼 느껴졌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선택권 없이 치러야 했다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를 팔고 얻은 것, 그리고 잃은 것

2년 전,
10년 넘게 타던 차를 팔았다.
그 이후로 대중교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중교통이라는 편리함과,
서비스 개선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기다림도, 불편함도,
예상치 못한 상황도
이제는 삶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중고차를 사야 하나.”
역시, 우리나라에서 "을"의 입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동차가 있어야 되는가?

그리고 곧이어 드는 생각.
“아직도 내가 겸손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인생 공부로 느껴지는 걸까.”

느리게 가는 법을 다시 배운다

그날 하루 종일
새벽의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문이 열리지 않던 순간,
말이 닿지 않던 공기,
비에 젖은 정류장.

하아, 정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안다.
그 기사에게 화가 났던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내 위치가 서글펐던 거라는 걸.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앞으로는
조금 더 천천히 가자고.
억울함에도 속도를 줄이자고.

새벽은 늘 그렇듯
새벽은 늘 많은 생각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대부분 말없이 지나간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움직이려 한다.
억울함에도, 불합리함에도 속도를 낮추는 연습을 하면서.
혹시 당신도 오늘, 

출근길이나 일상 속에서 비슷한 순간을 지나오지 않았는지—조용히 묻고 싶다.

그리고 을의 시간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