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나라 사람 중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그의 시는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에는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와 그의 시를 처음 접했던 것은 국어 교과서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윤동주라는 사람과 그의 시에 마음을 쏟기보다는 내 시험 성적을 위해 선생님이 알려주는 시에 대한 판서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그동안 윤동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우연찮은 계기로 본 영화 ‘동주’는 그에게 큰 매력을 느낀 계기가 됐다. ‘동주’는 윤동주와 그의 친척, 송몽규의 삶을 재조명한 영화로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흑백영화이다. 이 영화는 윤동주가 북간도에 살았던 시절부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는 시기까지를 필름에 담아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겪었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시에 대한 열정을 실감 나게 그려내어, 교과서로만 보던 윤동주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물론 영화가 100% 사실은 아니지만, 윤동주라는 거인(巨人)을 충분히 느껴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영화에서 감명받은 점 중 하나는 시 뒤에 감춰져 있던 윤동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윤동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그의 고뇌는 순수시에 대한 고뇌와 일본 유학 생활에 대한 고뇌로 나뉜다. 그는 순수 예술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시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벗인 송몽규는 문학의 순수성을 부정하고 도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그런 송몽규의 태도 앞에서 윤동주는 순수한 시가 그가 추구하는 이상인 조선의 독립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고 시의 무기력함에 대해 고뇌한다. 일본 유학길에 오를 때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는 창씨개명이라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일본 유학을 위해 이 이름을 발급받는다. 이 점에서 그것에 대한 회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일본인 이름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이후에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드러내 준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시 뒤에 숨겨져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윤동주의 모습인 것이다. 그의 인생을 이해하고 시를 읽어보면 그의 고뇌를 좀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마지막 장면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태도 차이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송몽규와 윤동주는 일본 형사로부터 똑같은 조서를 받는다. 송몽규는 그 조서들에 모두 순순히 지장을 찍지만 윤동주는 그 조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송몽규는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서 그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사실화하고 이를 통해 그가 꿈꿔왔던 이상을 얻고자 한다. 윤동주는 송몽규처럼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고뇌에 대한 결론이자 추구했던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의 시는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를 무기력했던 식민지 지식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윤동주가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만 쓰기보다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고뇌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상을 추구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윤동주가 무기력했던 식민지 지식인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항상 성찰하며 누구보다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고 이를 추구했던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그의 삶을 미처 알지 못한 채 그의 시를 읽는다. 물론 시를 순수하게 작품 자체만 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윤동주의 삶을 알고 그의 시를 읽으면 처절한 고뇌와 부끄러움, 그리고 부끄러움 속에서 반성하며 자신의 이상을 추구해 나가는 윤동주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동주는 옛날의 윤동주 시인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일단. 영화는 흑백이었고, 그때에, 감정에 몰입하기가 정말 쉬었다. 역사영화는. 볼 때마다 가슴을 울린다. 왜냐하면. 진짜 일어난 일을 가지고 만든 영화라, 실감도 잘나고, 가슴이,실감도잘나고, 더 지겹여진다. 동주는. 어렸을 때부터 시를 향한 마음이 남달랐는데, 집안에서는, 꼭 이과에 들어가 의사를 하라고 고집한 채 갈등과 대립이 있었지만, 동주는, 끝내 자신이 가고자 한 신념을 잘 선택했고, 하지만, 그 신념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였다. 문제는. 일제강점기를 맞이한 시대에, 일제강점기를, 하염없이 비판하는 시를 많이 썼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상경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순탄 없이 갔지만, 그 길은, 낭떠러지로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죽게 되는 길을 택한다.
이렇게 가슴 아픈 역사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그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영화 속에 깊게 빠져드는 연습을 하곤 한다. 마치네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무슨 행동을, 했었을까? 우리는? 고국의 영광을 위해 싸워 자신을 희생한 윤동주시인과, 그 외의, 독립투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바로, 공감뿐이다. 역사영화는. 그러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세상을, 살면서, 웃을 일이, 가장 많지만, 오늘같이, 동주를 보고 감상문을 쓰는 날에는 그들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감사히, 쓰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기에.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항상. 기억할 것이고, 그러면, 항상 기억이 날 것이다. 나를 위해. 이 나라를 지켜줄 그들을 위해서 말이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3.
영화 <동주>는 일본 경찰이 일본 유학생 윤동주를 취조하는 과정과 그때마다 윤동주의 고뇌 장면이 후반부까지 이어진다. 친구이자 이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만주에서 조선 유학한다.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제 강점기의 압력이 점점 심해지면서 그들은 창씨개명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마침내, ‘그야말로 영화처럼’ 윤동주는 ‘조국 해방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라는’ 송몽규와 그 뜻을 함께 한다. 윤동주는 일제 탄압에 저항하는 영문 시집의 영국 발간을 시도한다. 그러나, 귀국 직전에 일본 경찰의 유학생 탄압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면서 시집 발간 뜻은 꺾인다. 일본의 생체실험 도구로 희생당하는 윤동주와 송몽규.
시간이란 사람마다 다르게 흐르는 것일까. 아니, 사람마다 시간을 다르게 맞이하고 보내는 것일까. 윤동주와 송몽규, 그러나, 그들에게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지 않았다. 아니, 시간을 다르게 맞이하지도 보내주지도 않았다. 오직 정확한 시간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고, 그것이 시간이 되었다. 누가 주지도 간섭하지도 않은 그들만의 시간은 영화 <동주> 속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우리들 앞으로 다시 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일이란, 생각과 말이 같고, 그래서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다. 말로 약속하지 않아도 묵묵히 생각한 바를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 윤동주는 그래서 짧지만 한반도 몸통만큼 굵직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남긴 사람이다. 영화 속으로 함께 사라진 송몽규도 그랬다. ‘한 번 뜻을 세웠으니, 또 행동으로 옮겨봤으니,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말하며.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난 내내 꿈속에 빠져들었다. 극장 안이었는지, 영화 속이었는지, 꿈 속이었는지, 혹은 내 안이었는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 사이마다 꿈밖을 추억의 열차가 들락거렸다. 꿈 이쪽은 극장이었고, 꿈 저쪽은 모두 흑백 그림이었다. 어떤 그림은 그냥 멈춰 서있었다. 나는 그림 속에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그림을 보기도 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보면, 그림 속 그 누구의 옷자락을 문득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런 나를 힐끗 보다가 관객인 또 다른 나를 보고 묻는다. ‘그 나이 먹도록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화들짝, 꿈인 듯 영화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래, 대답을 해야 하긴 했다. 그런데? 그렇다, 어찌 누구라서 윤동주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에겐 교회 장로인 할아버지와 교사였던 아버지가 있었던 평온한 집안 정서를 괜히 부러워하며, 비겁하게도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주에서 서울이며 일본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의 교육 환경이 주어졌으니, 그 정도 못할 것이냐?’라는?’ 오기와 질투가 앞을 가린 것. 허! 나를 위한 화도 눈물도 나지 않으면서.
영화는 가끔 지나온 날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 <동주>는 더욱 그렇다. 그랬다, 돌아보면 순간마다 내 꿈이라며 펼치려 했던 내 행위들이 영화 편편 그림자가 되어 언뜻 비쳤다. 확신을 가지고 나만을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이려 했던 일들이었다. 지나온 것은 모두, 자랑이든 부끄럼이든, 흑백이 분명한 것 먼저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비겁하게도, 나는 그중에서도 좋은 것만 드러내고 펼쳐놓으려 했다. 허, 감히 그들의 시간과 의미와 나이를 견주려 하다니! 더욱, 그들에게 또 나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다시 3.1절 휴일이다. 이 글을 쓰는 한나절 동안, 봄기운을 새삼 느끼고 싶었다. 작년보다 다른 느낌의 봄을. 나이와 상관없이 또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봄은 찾아온다. 그러나, 동주나 몽규는 여러 봄을 맞이했겠지만, 다가오는 새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부끄럽지만, 나이가 한두 살 먹을수록 다시 맞이하는 봄을 또 새롭게 느끼고 싶은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중년의 나이에 본 영화 <동주>는 평범한 이야기를 새삼 떠오르게 했다. ‘너도 너만의 뜻을 아름다운 꿈에 담아라.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뜻을 계속 씻고 다듬어라. 다듬는 순간이 곧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그 순간의 즐거움을 누려라!’라는!’ 참 오래된 이야기를.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다시 뜻을 세우고 만지며, 그곳을 향해 움직이는 즐거움이란 영원한 것 아닌가? 나이가 들수록 그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 이건 분명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영화 <동주>를 본 사람 대부분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살고 싶을 거다. 자유니 민족이니 독립이니 시인이니 하는 수식어 때문이 아니다.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떳떳하게 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요, 그 매 순간마다 나에게 주어진 그 길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가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 길 위에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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