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힐링(Healing)인가 필링(Peeling)인가?
우리 사회에 한 때 "힐링(치유와회복)""힐링(치유와 회복)"이라는 말이 유행인적이 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와 같이 우리는 일상에서 주어진 사회구조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상처받고, 스트레스받고, 지치면서 "힐링"이라는 명분으로
일상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그 사회 구조속으로 들어와 또 다른 "힐링"을위해
그 일상을 반복하였다. 의미없는 "힐링"의 연속일 뿐…
힐링의 인문학이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라면,., .
필링의 인문학은 나를 지치게 만드는 본질을 찾아 문제 삼는다
인문학은 단순히 교양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나인 ‘실존적 자아’를 권력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또 다른 나인 ‘성찰적 자아’를 만나러 떠나는 여행인 것이다.
인문학은 나와 내가 사는 공동체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지식. 질서. 진리. 권력을.지식.질서.진리. 벗겨내 그 이면을 문제 삼는 것이다..
고달픈 현실을 힐링하며,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실을 필링 하는 등에가 되어 새로운 상상의 산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힐링보다는 필링이 인문학의 본래 정신인 것이다..
사회의 공통관심사, 굳어진 명분이 하나의 "틀"이 되어 우리를 가두고 우리는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를 둘러싼 그 "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틀"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써,
과연 나는 생각하는지, 생각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 권력이 생각한다.
진실은 누가 만드는가? 역사가와 지식인을 동원한 현재의 권력, 즉 승자이다.
나를 지치게 만든 권력관계와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개인의 힐링만으로 행복질 수 없다.
실존적 나는 생각당하며 살고 있다.
정치의 대상이 된 나는 어두운 뒤안길의 사회에서 불행하다.
희망은 어디 있는가.
세월호 참사는 우리 개개인의 삶과 행복, 심지어는 생명 자체도 사회의 권력관계와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권력과 자본의 유착관계, 관료와 자본 경찰,
언론의 커넥션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고 지지해 준 국가발전주의와 성장우선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이를 지지한 국민들. 이런 모습 하나하나가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이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구조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단지 몇 명을 처벌하고 정권을 바꾼다 하더라도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다른 자들이 들어서서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며, 우리 사회 곳곳의 다른 곳에서는
똑같은 형태의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화재,
화성 씨랜드화재, 태안해병대캠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등 헤아릴 수 없는 참사들을
경험하고도 계속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조를 문제 삼고 그 구조를 바꾸려 하는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떠한 실천일까.
도처의 시민들이 탐욕과 부조리, 왜곡과 위선에 맞선 ‘등에’가 되어야 한다.
경쟁, 효율, 성장의 이름으로 포장된 탐욕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드러내야 한다..
그리하여, 생각당하는 대상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성찰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큰 변화를 만드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처럼 도처에서 권력과 제도의 가면을 벗기면서
토론하고 실천하는 시민들에게서 ‘근거 있는 낙관주의’의 희망을 발견한다.
-. 시장이 생각한다.
호모에코노미쿠스, 시장형 인간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이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인간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모든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시장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시장의 진입률, 더 나은 상품을 살 수 있는 능력, 심지어 나의 욕망조차도
시장이 결정한다.
-. 욕망/과시/두려움이 생각을 지배한다.
내 욕망뿐 아니라,.
각종의 부정적인 예를 과대 포장해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궁극적으로 제품의 노예로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시장에 포위되어 있다..
내속의 숨은 나를 조종하는 것은 시장이며 상품 물신주의다. 시장은 공포를 조장한다. 그리고
마치 시장이 나를 보호해 줄 것처럼 속삭인다.
-. 세상의 프레임(구조물)이 생각을 지배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인 구조물이다. 따라서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언어를 취합하는 것이다.. 이 언어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생각이고 이념이며 일관된 태도다.
이 프레임 때문에 실명 증세를 보인다. 이렇게 되면 권력과 시장의 지배는 은폐되고,
프레임은 마치 내가 생각해 사물을 판단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 생각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런 생각이 조직되고 체계화된 형태가 바로 이념이고, 철학이며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생각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폭력을 수반한 당파적인 것이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샘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이라는 저수지에서 나온다.
지식, 역사, 상식. 이것의 이면에는 어떤 권력, 즉 국가든 자본이든
그들의 의지와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나 상식은 교양이 아니라
지배의 무기이고 정치의 싸움터이고 생사를 결정하는 바로 미터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매트릭스 안에 머물 수 있겠는가.
-. 내 생각의 배경
자본가의 등장, 이기적 인간의 등장으로 우리의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것이다. 자본주의는 내 욕망의 토양이고 설계자이고 도면이다.
따라서 도면과 설계를 이해하면 나를 이해하지 않을까?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업자나 제빵업자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도주의자가 아니라
이기심에 호소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인간의 이타성과 이기성이 인간을 협력이나 경쟁으로 바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협력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이타적인 인간이라도
제도와 환경에 따라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제도와 구조
그리고 이것에 개입하는 정치를 이해하여야 한다..
-. 경쟁과 연대
연대란, 소득이전을 통해 사회가 위험을 공동으로 분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성은 ,
무상의료나 교육, 아동수당과 같은 사회임금을 통해 모든 시민을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이들이 처하거나 처하게 될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태도다.
경쟁이란, 시장의 경쟁에서 모든 것을 구하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에 국가가 공정인
책임을 갖고 개입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이 보기에 연대성은 의존성의 증가이고, 약자들이
빠지기 쉬운 복지병으로 귀결된다.
-. 내 생각의 제작자, 정치가 그 일을 한다.
정치는 어떤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나쁜 놈 이기도 하고 좋은 놈 이기도하다.. 그렇다고 형편없이 나쁜 놈도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 100% 반영되지 않아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반영이 안 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상한 놈이다.
정치는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누구의 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정치가 하는 일
정치는 탈상품화 수준을 높일 뿐 아니라 계층화 수준을 낮춰 상대빈곤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사회정책 대상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을 높이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취약계층, 더 나아가 시민에게 밥을 먹여준다. 그러면 정치는
이 정도 일만 하는가. 아니다. 정치는 더 근본적인 일에 관여한다.
-. 정치는 나의 일이다.
우리 모두는 실제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과 무관심, 비판과 비난도 모두 정치행위이다.. 이것도 어떤 결과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현상과 결과에 대한 공모자며, 공범자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과하고 있는 일을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를 혐오하며 유기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은 정작 이 일에 긴밀하게 관여한다는 것을 모른다.
-. 정치와 인문학은 상징계의 채색자이다.
이처럼 정치의 핵심 기술은 상징계에 자기 색깔의 상식을 진리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상식이 이 일을 가장 자연스럽게 하기 때문에 정치의 기술은 자기 상식을 다른 사람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가 자기 생각을 채색하려 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상식이다.
정치가 좋은 놈이나 나뿐 놈이 되어 한쪽의 생각을 강요하고 진리처럼 만들려고 할 때,
인문학은,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상한 놈이 되어 비판하며 상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문학은 정치에 대해 민감한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 존재하는 학교, 공장, 가정은 물론 정치의 싸움기술인 상식에 대해 비판하고 또 비판해야 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등에처럼.
또 노동을 외면하는 현실을 문제 삼아 비판하고 성찰하며 상상할 수 있는 실천 지혜의 샘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숨어있던 억압과 차별이 드러난다.
정치가 이념과 계급을 배제하면서 중립인 척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며,, 이때 인문학이
힐링의 섬에 갇혀 잠만 잔다면 정치는 이런 인문학을 이용해 인간의 얼굴을 한 흉악한
괴물로 변할 것이다.
우리가 ‘필링’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인간다운,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고 우리의 후손까지도, 전 인류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링의 인문학’은 이 사회를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따뜻한 인문학’이다. ‘필링의 인문학’은 우리에게 ‘필링’의 고통과 성찰의 노력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 왜? 인문학이 "힐링" 보다 "필링"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하는 대목이다."